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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고등어의 추억

김주부노트 2018. 5. 1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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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고등어의 추억

한나라당 대표 선출을 위한 당원투표와 여론조사가 한창 진행되던 엊그제 일요일, 왜 뜬금없이 고등어가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태풍이 비껴가고 다시 몰려든 장마구름 군단이 쏟아낸 장대비로 오랜만에 가족들이 식탁에 몰려든 때문이었을 게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고등어 한 마리가 온 가족의 밥상을 풍족하게 해주던 시절이 있었다. 노모가 가난에 찌든 석쇠로 조심스레 구워낸 고등어 한 마리엔 조촐한 행복이 묻어났다. 정치는 엄동설한이었지만, 내일은 형편이 나아질 거라는 꿈이 있었고, 잘난 것 없는 평범한 가정이 누구에게든 든든한 정신적 둥지였다.

 국민소득이 한 이십 배쯤 증가한 오늘날, 자가용시대를 일찌감치 돌파하고 명품소비시대로 진입한 요즘, 국민들 마음의 바닥엔 어떤 생각이 고이고 있는가? 삼십 년 전 백열등 밑의 조촐한 행복과 미래 자신감은 어떤 모습으로 진화했을까? 형편은 나아졌지만 꿈꾸기는 어려워졌다. 인플레된 학력에 일자리는 모자라고, 가장들은 언제 날아들지 모를 해고통지서에 가슴을 졸인다. 쓰임새와 가계빚이 동시에 늘어나 희망은 점점 사그라진다. 녹슨 석쇠 대신 빛나는 오븐으로 육(肉)고기를 구워내도 둘러앉은 식탁엔 평온함을 차릴 수 없다. 집권당의 전당대회라면 적어도 오늘날 널리 퍼진 사회심리, 이 낯선 정신적 허기에 왜 빠져들었는지, 어떻게 해결할 건지를 말해줘야 한다. 고등어의 추억이 무작정 되살아난 이유가 그것이었다. “대가리 자르지 마이소/생선머리보다 더 억센/ 늙은 어머니 고집으로/거친 파도 넘어서/온전히 밥상까지 당도한/고등어 자반 한손”(이인수 詩, ‘고등어’에서). 집권당이 ‘고등어 자반 한 손’ 같은 그 시대의 반찬으로 우리를 달래주었나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사회심리를 집약하는 두 단어는 ‘향수’와 ‘불안’이다. 예전에는 부자 소리를 들었을 재산목록으로도 결코 행복하지 않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현실은 짜증스럽다. 게다가 의지와 능력만으론 안전한 생애설계가 점점 어려워지는 이 변덕스러운 선진경제에서 미래는 꿈이 아니다. 불안바이러스가 몸과 마음을 점령했다. 풍요한 시대를 덮친 불안과 짜증이 궁했던 때의 작은 행복과 접속해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대, 세대와 계층을 막론하고 자신감을 상실한 시대에 집권당의 대표선수들이 쏟아낸 말들은 대체로 허허로웠다. 맞는 말의 성찬이었다. 재래시장, 중소기업, 서민복지, 물가 같은 절박한 과제들을 야무지게 처리할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떤 정신적 좌표로 불안한 시대를 건널까, 흔들리는 현실을 어떻게 보수(補修)하고, 미래의 꿈을 어떻게 보수(保守)할 것인가는 더욱 그랬다.

 인물구도로 꽉 짜여진 한국의 정당체제에 이런 큰 그림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더군다나 이번 전당대회는 잔여임기를 채울 대표선수를 뽑는 대회가 아닌가. 집권당은 네 박자 리듬을 밟는다. 초기의 득의만만, 중기의 책임공방, 후기의 지리멸렬, 그리고 말기의 이합집산. 정치인들이 정신을 가다듬어야 할 때는 말기의 이합집산 과정이다. 줄을 잘 서면 생명연장이고, 잘못 서면 사망선고다. 대선 주자가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 정치판에서 통 큰 철학과 시대정신을 거론하기가 거북살스럽고 때론 위험천만하다. 그런데 내년 총선과 대선 판짜기를 맡을 지도부라면 국민의 초조한 자화상을 수선할 보살핌의 메시지가 가슴을 울려야 했다. 정치철학의 부재, 청와대와 힘겨루기, 대선 주자 눈치 보기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정당정치의 빈곤을 초래하는 고질적 요인이다.

 그럼에도 홍준표 체제가 어쨌든 부자정당의 말랑한 구태를 벗고 야무진 행보를 취할 거라는 한 가닥 기대는 있다. 아무리 뜯어봐도 후덕한 정치와는 거리가 먼 이 좌충우돌형 리더가 모래알 같은 한나라당 의원들의 군기반장으론 안성맞춤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여기에 지도부에 대거 입성한 젊은 정치인들이 화합정신과 미래운영의 지혜를 수혈하면 후기의 지리멸렬을 피해갈 여지도 있다. 당이 핏대 리더십과 미래형 젊은 리더들로 정렬되었으니 유력주자 박근혜는 천운(天運)이 있는 사람이다. 민주당이 홍준표 체제에 긴장할 만하다. 이념군단 민주당엔 누군가 대선 주자로 나설 때 당 군기를 잡아줄 선수가 마땅찮은 것이다.

 손학규로서는 초조한 국면이 시작됐다. 그러나 그건 당 내부 문제지 우리의 주관심사는 아니다. 시대의 횡포에 지친 국민들은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고등어 자반 한 손 올려준 노모의 손길을 원한다. 이젠 환갑에 가까운 가수 김창완이 그 어려웠던 시대에 이렇게 노래했다. “어머니는 고등어를 절여 놓고 코골며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고등어구이를 먹을 수 있네”라고. 누가 자반 한 손 올려줄까, 바야흐로 고등어 정국이 시작됐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출처: 중앙일보] [송호근 칼럼] 고등어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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